幼年의 記憶들 / edmondus
1961년 쯤이었지. 아주 어렸을 때였다.
아버지의 직업은 경찰공무원이셨다.
사천의 큰 경찰서에서 근무하다가 사천만의 조그만 바닷가 마을에 밀수꾼 배들을 단속하는 임무를 맡게 되면서 거처를 그곳으로 옮기신 것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으로 진급한지 얼마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1년을 조금 넘게 살았던 사천만의 한 변두리 광포라고 부르던 마을은 키 큰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뒷산과 개펄이 넓은 앞 바다를 사이에 둔 풍경이 참 아름다운 어촌이었다.
봄이면 먼 바다에 줄지어 선 작고 큰 섬들 위에 맑은 뭉게구름은 둥실 떠있고 남실대는 잔파도에 얹혀 넘어오는 짭조름한 해풍은 코끝을 간지럽혔다. 밀물이 들 무렵 석축을 쌓아 간신히 지탱해 만든 조그만 방파제에 나가면 쪽빛 바닷물 속엔 제법 큰 칼치들이 떼를 지어 은비늘을 번뜩이며 유영을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놀라운 일이었다. 썰물이 날 때면 혼자서도 곧잘 방파제 앞 개펄에 나가 조개도 줍고, 굴을 따서 먹기도 하고 놀다가 개펄의 조그마한 웅덩이에 지천으로 널린 작은 가자미새끼 몇 마리를 잡아 고무신에 담아 집으로 돌아 올 무렵 바다는 어찌도 그렇게 끝 모르게 푸르고 아름다운지 가슴이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마을에는 내 또래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대여섯 있어 학교를 오갈 때면 늘 어울려 정답게 십리도 더 되는 먼 길을 면소재지 학교까지 탈래탈래 걸어 다녔다. 한 시간이 족히 걸리는 먼 길이었지만 대여섯 아이들이 줄지어 소꿉놀듯 어울려 걸어 다녔으니 학교 가는 일이 그리 심심할 것도 또 멀다고 느껴 본적도 없었다. 그 때도 아이들 중 형뻘쯤 되는 누군가는 대장이 되었고 학교 선생님이 손에 쥐어준 깃발을 들고 맨 앞장서서 걸으면 모두들 아무소리 없이 졸졸 따라 다녔다.
마을은 그리 크지 않아 큰 소나무 숲 아래로 바닷가 기슭을 면해 열 남짓 되는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대개 동네사람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리거나 남의 배를 타기도 하고 또 개펄에서 조개를 잡아 삶을 잇는 전형적인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내가 살았던 집은 그중 바닷가 조그만 방파제 바로 옆 가난한 어부의 초가집 행랑채를 하나 세 들어 그곳에서 우리가족 네 식구가 살았다. 주인집은 나이 많으신 할머니 한 분과 부모님 연배의 부부 그리고 내 또래의 남자애 하나와 내 동생 또래의 학교에 다니지 않는 작은 딸아이가 하나 있었다. '정구수'라 부르던 주인 집 애는 늘 친구로 단짝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바닷가에 오래 산 그 아이는 바닷가에서 요령있게 노는 일도, 이상하게 생긴 작은 고기의 이름도 대개 다 알고 있는 까닭에 어떤 때는 마치 그 애가 나보다 훨 더 나이가 많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세 들어 살던 행랑채의 서쪽으로는 쪽창이 있어 창을 열면 지척에 파도가 흔들거리는 바다가 있었으니 밤중에 잠들었다한들 파도소리를 듣는 꿈을 꾸며 밤을 지샜으니 지금 이 나이에도 밤바다 파도소리가 귀에 닿을 듯 특별히 정겹고 그리운 것은 그때 의 기억들이 편린으로 각인된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또 생경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마을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더 산을 타고 소롯길을 올라가면 무섭게도 어린아이들을 잡아다가 술을 담아먹는다는 그 무서운 문둥병 환자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산다는 영신마을이 있었다. 그곳은 우리 같은 꼬맹이들은 감히 접근할 생각조차 못하는 무섭고 두려운 곳이었다. 우리들에게 늘 그곳은 두려우면서도 신비한 영역이었고 금단의 세계였다. 물론 그 곳에 살면서 한 번도 이 동네 아이들이 우리와 같이 학교를 다닌 적도 없었고 또 얼굴을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다. 그리고 호기심으로도 가까이 가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경찰관 정복을 차려입고 그곳을 다녀오시는 아버지께 그 동네 소식을 묻기라도 하면 늘 손사래를 치며 절대 가까이 가지 못하게 엄명을 하셨다. 지금도 다르지는 않지만 요즈음 한센병이라고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그때의 문둥병은 지금과 달리 치료법이 전혀 없는 천형의 벌이었고 한번 문둥병환자가 되는 순간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금기시 되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영신마을은 여전히 모습을 달리한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아직도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끝내 해보지 못했다. 어릴 때 한번 각인된 기억이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까닭일것이다.
시간이 한가한 휴일이면 아버지는 가끔 어린 내 손을 끌고 바닷가에 나가셨다. 특히 여름날 카랑카랑하게 뜨겁던 햇살도 숨이 죽어 제법 바닷바람이 시원해질 무렵 바닷가 언덕에 앉아 아름답게 물들며 지는 석양을 바라보다 해가 먼 바다 건너 서쪽 산 뒤로 자취를 감출 무렵이면 내 손을 잡고 해안의 작은 사구의 언덕길을 걸어 돌아오시곤 했다. 지금도 그 일은 아버지께서 밀수선 단속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실안 바닷가 아름다운 저녁 낙조 풍경에 매료되어 어린 나를 데리고 나가셨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제법 어둑어둑해져 긴 그림자마저 사라질 때 쯤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해변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모래톱길은 아득한 해조음이 파도를 타고 그리움처럼 밀려 드는 곳이었다.
어둑한 갯바위에 새파란 형광색 번지는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도 얼마나 놀랍고 신기하던지...... . 때로는 무섭기까지 해서 아버지 허리춤을 파고 들기도 했지.
아버지께서는 가끔은 낚시를 즐기셨다. 햇살 맑은 날, 하얀 자갈이 사구의 언덕을 이룬 바닷가에서 낚싯대를 던지고 앉아 계시면 아버지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파도에 남실대며 춤추는 찌를 바라보던 어린 내 눈에 든 사천만의 푸른바다는 늘 아름다운 그림이었고 온세상의 바다가 되어 수묵화처럼 잔잔한 풍경이 되어주었다. 그러다 가끔 은빛 비늘을 번득이며 물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몸부림으로 퍼덕이며 낚싯줄에 끌려오던 바닷고기의 환상적인 모습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살아 꿈틀대는 쪽빛 기억이다.
그 무렵이 내 어렸던 유년시절 중 가장 기억에 남고 행복했던 때가 아니었을까?
그렇듯 내겐 이 세상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그 누구의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분이셨던 그 분은 안타깝게도 이미 30여년전 내 곁을 떠나셨다.
지금도 가끔 시간이 나거나 삼천포에 갈 일이 있으면 일부러 그 길을 두른다. 그러나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이미 그곳은 옛날 모습은 아니다.
내가 가자미 새끼를 줍던 앞 바다는 화려한 마리나 요트 계류장으로 모습이 바뀌었고 어설픈 석축으로 위태롭게 쌓았던 방파제는 시멘트 범벅이 되어 더 크고 우람하게 만들어 바다 한가운데로 쑥 밀고 들어갔다.
예전 살던 집이며 행랑채는 이미 헐리어 없어지고 번듯한 양옥집이 크게 들어섰지만 그러나 그 곳 풍경을 바라보게 되는 내 눈은 언제나 촉촉이 젖어 아버지 손을 잡고 걸어오던 꼬마의 그 옛날의 눈부신 햇살과 짭조름한 갯바람 불던 그 바닷가 사구의 언덕길을 무심코 떠 올리고 있는 것이다.
2011년 늦은 가을 삼천포 광포해변 에서
Waterfall (Raining Version) _ Steve Rai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