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날들의 풍경들/旅行, 風景 사진틀

선비문화답사여행기 1 (전남 장성 필암서원을 찾아서..)

에드몬드 2012. 8. 27. 19:40

 

 

 

 

 

청선비문화교육연구회 필암서원 답사기  (2012. 8  여름방학중)

 

 

 

 

 

 

 

 

 

 

 

 

 

8월 하순, 늦더위는 지금도 맹렬하다.

 

초록에 지친 키 큰 나무들도 사람들만큼 더위에 힘들기는 매한가지, 숨을 헐떡이며 서서, 가끔 흩날리며 뿌리는 소낙비를 목마르게 기다린다.

 

하늘에 떠 있는 땀에 젖은 구름도 높은 고개를 넘다 산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여름날 더위에 지치기는 키 큰 나무, 푸른 숲도, 젖은 구름도 어디 다르랴?

 

 

 

우리 산청선비문화교육연구회 書院踏査旅行은 1년에 두 차례 여름과 겨울방학 기간 중 진행된다. 이번 여름방학기간 중에는 일찍이 남도 제일 선비고을로 불리는 전남 장성군에 있는 필암서원이 그 목적지이다. 그리고 덤으로 필암서원의 인근에 있는 한국의 8경에도 뽑힌 가을 단풍길로 이름이 높은 백양사, 청백리로 이름 높은 아곡 박수량의 白碑와 홍길동 테마파크를 둘러보기로 한다.

 

 

 

전남의 최북단에 자리 잡은 장성군은 북쪽으로 백암산· 입암산· 방장산을 거느리고, 동쪽은 불태산, 서쪽으론 축령산이 자리 잡아 산이 성처럼 둘러서 長城이라고까지 불렀다고 알려 진 곳이다. 이 고장은 지금 인구 약 4만 7천명(2011년 말 기준)이 살고 있으며 영산강의 母川인 황룡강이 장성읍 시가지 옆으로 흐르고 있고 교통으로는 호남고속도로가 시가지 옆을 따라 지나가고 주변으로 2008년에 개통된 담양-장성-고창 고속도로가 있는 까닭에 도시 발전 전망도 매우 밝은 곳.

 

조선중기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박문수도 ‘山水 좋기는 첫째가 長城이요, 둘째가 장흥’이라 했을 만큼 이곳의 風光은 여전히 빼어나다.

 

 

 

일찍이 조선 중기 전주부윤을 지낸 조종생(趙從生)은 장성을 두고 ‘산회수곡자천성’(山回水曲自天成)이라 했다. ‘산이 둘러 있고, 물이 굽이쳐, 스스로 하늘을 이뤘다’고 격찬한 곳이다. 장성은 노령산맥이 빚어낸 산과 골짜기에 어린 기(氣)와 풍광이 넉넉하여 그 예사롭지 않은 자연으로 기품있는 문향의 고장이 되어 호남에서도 매우 이름이 높다. 장성인들이 자랑하는 선비정신 '의리’와 '충절’도 바로 이런 자연환경이 주는 선물이 아니었을까?

 

사람은 자기가 몸담고 사는 자연을 저절로 닮아가며 사는 법이다.

 

 

 

이토록 山水가 아름답기로 이름 높은 文香의 고장이니 이름난 선비가 없을 수 없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비들 가운데에서도 호남에서 유일하게 ‘동방 18현’으로 손꼽히는 유학자 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 선생을 배향하는 필암서원은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번지 약 1800평 넓은 땅에 우뚝 자리를 잡았다. 선생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홍문관저작,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 등의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제자였던 인종이 즉위 후 재위 9개월 만에 갑자기 병사하는 일을 겪자 이를 크게 비관, 마침 윤임, 윤형원 권력싸움에 의한 을사사화이후 칭병하여 관직을 던져버리고 고향으로 낙향, 오로지 성리학에만 몰두하며 시를 짓고 제자를 양성하는 일로 비통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선생은 명종 3년 순창 점안촌의 백방산 자락에 훈몽재라는 강학당을 짓고 송강 정철(松江 鄭澈), 금강 기효간(錦江 寄孝諫), 월계 조희문(月溪 趙希文) 여윤 변성온, 고암 양자징, 덕계 오건, 고반 남언기, 달부 노적, 양보 윤기 등과 같은 많은 제자를 길러내어 이곳 호남유림을 대표하는 儒宗이 된 분이다.

 

 

 

筆巖書院은 선생의 사후 30년이 지난 뒤 선생의 고향인 기산리에 그의 후학들이 중지를 모아 세우고 뒷날 현종이 편액을 내린 사액서원으로 조선말 대원군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의연하게 남아 호남 유림의 자존심을 지킨 대표적인 서원이다.

 

 

 

하서선생과 仁宗은 각별했다고 한다.

 

선생은 인종의 세자시절 세자를 모시고 공부하는 곳인 세자시강원에서 세자보도라는 직책으로 인종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인종은 선생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서로 의기가 상통하였다고 한다. 세자는 선생에 대한 정이 각별하여 특별히 墨竹圖를 그려 하사를 했는데 선생은 그 답으로 이 墨竹圖에 다음과 같은 詩를 적어 和答을 하였다.

 

 

 

根枝節葉盡精微(근지절엽진정미) 뿌리 가지 마디 잎새 모두 다 정미롭고

 

石友精神在範圍(석우정신재범위) 굳은 돌은 벗인양 주위에 들어있네.

 

始覺聖神侔造化(시각성신모조화) 성스런 우리임금 조화를 짝하시니

 

一團天地不能違(일단천지불능위) 천지와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셔라.

 

 

 

선생은 고향에 내려 온 이후 인종이 서거한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병을 가지고 집 남쪽에 있는 산에 올라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 … . '를 거듭하며 밤을 지새고 내려오기를 평생을 거른 일이 없었다고 하니 제자였던 인종과 그의 스승이었던 선생과의 정리가 참으로 각별하였음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당시 인종의 갑작스런 병사는 독살일 수도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으니 스승으로서 제자였던 왕의 급서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은 오죽하였으랴?

 

이후 그는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낙향 후 그가 지은 自然歌를 살피면 시와 술을 즐기며 마음이 관대해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던 그의 정신세계를 느낄 수 있겠다.

 

 

 

靑山도 절로절로 綠水도 절로절로

 

山절로 水절로하니 山水間에 나도절로

 

그 中에 절로 난 몸이니 늙기조차 절로 하리.

 

 

 

 

 

 

 

확연루(廓然樓)는 필암서원(筆巖書院)의 정문이다.

 

 

 

 

 

 

 

(홍살문 오른편으로 수령 200년쯤 된 保護樹 은행나무가 있고 왼편으로는 드러누운 下馬石이 보인다.)

 

 

 

 

 

筆巖書院은 호남지방의 儒宗으로 추앙을 받는 文正公 河西 金麟厚(1510-1560)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이기도 한 鼓巖 梁子徵(1523-1594)을 배향하고 있다. 선생의 사후 30년이 지난 선조 23년(1590), 호남의 유림들은 그의 道學을 기리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祠宇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서원이 소실되자 인조 2년 (1624년)에 황룡면 증산동으로 옮겨 세웠다. 효종 10년(1659년)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筆巖”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수해를 입어 현종 13년(1672)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졌고 1786년에는 양자징도 함께 모셔졌다고 한다. 양자징은 소쇄원의 주인인 양산보의 아들이기도 하다.

 

筆巖書院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많은 서원들이 훼철될 때에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원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廓然樓의 현판은 尤庵 宋時烈의 글씨이다.』

 

 

 

*尤庵은 栗谷 李珥, 沙溪金長生으로 이어지는 영남 기호학파의 정통을 잇는 학자. 西人(노론)의 거두로 우암에 대한 평가는 명암이 매우 극명하다. 그를 옹호하는 노론 측에서는 그를 宋子라 칭하지만, 南人, 소론에게서는 惡魔로까지 저주 받는 인물

 

 

 

 

 

 

 

『廓然樓는 정면, 측면 모두 3칸인  누마루 건물로 지붕은 팔작으로 지어졌고 네 귀퉁이에 만들어진 귀공포는 특별히 엄숙하면서도 고졸(古拙)한 멋을 풍긴다고 앞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다.』

 

 

 

 

 

 

 

 

 

『筆巖書院의 정문인 廓然樓는 출입문의 상부에 우물마루가 깔린 다락집 형식의 누(樓)가 있는 門樓로 된 建物. 廓然樓의 2층 문루는 옛 선비들이 高談峻論이나 詩作을 통해 풍류를 나누던 휴식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들보에 현란한 솜씨로 그려 넣은 靑龍과 黃龍의 자태도 예사롭지 않다.』

 

 

 

 

 

 

 

 

 

『문루로 된 다락집 형태의 출입문은 구조상 아래를 멀리 조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므로 외적의 방어, 행정체계 유지, 출입의 통제와 감시 기능을 위주로 한 곳에 세워졌다. 궁궐·도성·산성·읍성 등 성곽의 출입문, 지방관아의 정문인 아문(衙門)은 물론 서원(書院)과 향교(鄕校)의 정문인 외삼문(外三門), 사찰의 출입문 등에 사용되었다.

 

 

 

향교의 문루로는 단양향교의 풍화루(風和樓), 동래향교의 반화루(盤花樓), 서원의 문루로는 도동서원의 수월루(水月樓), 武城서원의 현가루(絃歌樓), 필암서원의 廓然樓 등이 있고. 사찰의 문루로는 해인사 구광루(九光樓), 전등사 대조루(大造樓), 용주사 천보루(天普樓), 부석사 안양루(安養樓), 봉정사 덕휘루(德輝樓) 등이 있다. 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평면구조에 팔작지붕형태의 다락집으로 우측문은 입장 때 사용하고 좌측문은 퇴장 때 쓰는 문이다. 다만 가운데 문은 오로지 나랏님이나 귀신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라 하여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지만 춘추로 제를 올릴 때와 같이 서원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경우 여는 것이 관례다.』

 

 

 

 

 

 

 

 

 

筆巖書院은 河西 先生에 대한 제사의 공간과 교육 및 학문의 수련 공간이다. 이 서원은 장서공간, 지원시설공간 등 조선시대 서원의 기본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서원으로 현재에는 사적 242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최근 유네스코 인류유형문화유산으로 등재 노력중이라는 말을 듣는다.

 

 

 

 

 

 

 

(맨 왼쪽 건물이 西齎인 崇義齎이고 가운데가 敬藏閣 그리고 오른쪽이 祐東詞으로 들어가는 內三門)

 

 

 

 

 

 

 

풍수적으로 봉황이 임금의 서신을 물고 온다는 단봉함서형(丹鳳含書形)의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筆巖書院 역시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前學後廟 형식으로 서원의 마당에 따로 敬藏閣이라고 하는 별도의 건축물이 있어 눈길을 끈다. 경장각의 현판은 훗날 정조대왕의 어필이라 각별하게 아끼고 다듬어 걸었단다. 그래서 따로 벌레나 새가 훼손하지 못하도록 그물로 된 망을 둘러 현판을 길이 보존한다. 경장각 전각 안에는 인조가 선생에게 하사한 墨竹圖와 이를 판각하여 새긴 목판이 보존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內三門을 들어서면 제사공간인 祐東詞가 있다. 오늘은 祐東詞의 문이 잠겨 안으로 들어 가 보지는 못했지만 주벽으로 하서 선생과 따로 그의 제자이며 사위이기도 했던 고암 양자징을 배향한 祠宇이다.

 

 

 

 

 

 

 

成均館이 조선시대 최고의 공립교육기관이라면 지방에 여럿 있던 書院은 당시에 최고의 사립교육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곳은 書院의 중요 기능 중 한가지였던 학문을 수련하던 공간의 강당으로 靑節堂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처마 밑에 있는 筆巖書院이란 현판은 봉계 윤봉구가 쓴 것이고 대청마루에 있는 靑節堂이란 현판은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쓴 글씨라고 한다.

 

 

 

 

 

 

 

靑節堂 마루에서 동행한문화해설사로부터 筆巖書院의 역사와 유래를 듣는 회원들의 모습이 진지해 보인다.

 

 

 

 

 

 

 

 

 

 

 

 

 

 

 

筆巖書院의 서편에 따로지은 유물전시관(원진각)에서 필암서원의 모형도를 찍은 사진 -전형적인 前學後廟 형식이다.

 

 

 

 

 

 

 

 

 

 

 

 

 

 

 

(서 있는 사람들의 뒷 건물이 東齎인 進德齊이고 맞은편이 講學堂인 靑節堂 오른쪽 건물이 崇德薺 일부)

 

 

 

東齋인 進德제와 西齋인 崇義薺 懸板은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쓴 글씨이며 進德薺에는 院生들중 선배들이, 崇德薺는 후배들이 기거했던 곳이라 한다.

 

 

 

 

 

 

 

 

 

 

 

필암서원계생비(筆巖書院繫牲碑) 계생이란 말은 붙들어 맨다와 희생(犧牲:희생할 때 희(犧)는 숫소, 생(牲)은 암소를 의미한다고 함)을 합한 말로 서원의 제사에 쓰이게 될 가축을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도록 붙들어 이튿날까지 튼실하게 잘 견디는 건강한 놈을 고르기 위해 매어두고 충둔예를 지냈던 곳이란다. 문화해설사 말로는 碑文은 앞뒤로 서로 다른 바 있어 공간 활용을 잘했다고 하는데...

 

오른쪽으로 東齋인 進德齋가 확연(廓然)하게 드러나 보인다.

 

 

 

 

 

 

 

 

 

참고로 동방 18현에는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김인후 등이다. 이중 호남출신으로는 河西 선생이 유일하다.